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97년 외환 위기/영향 (문단 편집) ==== 대중문화·IT 업계 ==== [[대중문화]] 업종도 심한 타격을 입은 건 마찬가지. 산업 특성상 국민생활이 윤택해야 꽃피는 게 문화인데 이 때 한 번 죽었다 살아났다. 당장의 생계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절박한 처지의 실직자들이 거리에 쏟아져나오고 그나마 직장에 남더라도 월급은 점점 더 깎여만 가는데 사람들이 대중문화에 신경쓸 여유가 있었을 리가 없다. 특히 환율에 영향을 받는 외국 뮤지션 공연의 경우 갑자기 뛰어오른 환율 때문에 공연 기획사들이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. 물론 1998년 [[메탈리카]] 내한 때처럼 기획사에서 한국의 사정을 설명한 것을 이해하고 자신들의 개런티를 25만 달러나 깎아주는 [[대인배]]적인 사례가 있기는 했다. 그리고 [[게임]]이나 [[애니메이션]] 같은 [[콘텐츠]] 분야는 투자자나 유통사들이 대거 발을 빼면서 기존의 시장이 급격하게 무너지는 현상을 겪기도 했다. 특히 1998년에 방송된 [[한국 애니메이션]] [[스피드왕 번개]]는 제작사 측이 당초 반응이 좋으면 세계무대를 배경으로 한 시즌 2 제작을 하기로 되어 있었고 흥행도 좋은 편이었으나 이 사태의 여파로 인해 그대로 시즌 2 제작계획이 엎어져 버렸다. 또 같은 해 초 TV 방영을 시작한 [[바이오캅 윙고]]는 [[삼성그룹]] 계열 삼성영상사업단에서 야심차게 추진한 프로젝트였지만 종영 후 삼성영상사업단이 해체되면서 협력사였던 스타맥스를 통해 [[비디오테이프|VHS]] 타이틀로만 출시되고 [[DVD]]로는 아예 출시조차 되지 않은 채 기억속에서 잊혀졌다. 출판만화 역시 엎친데 덮친 격으로 [[1997년 청소년보호법 파동]]의 여파와 외환위기 콤보로 1998년에는 성인만화잡지 <미스터 블루([[세주문화]])>, <매주만화(트루패밀리[* 1996년 격주간으로 재창간될 당시 상호명은 미디어유니버스.])>[* 모체인 [[주간야구(잡지)|주간야구]]가 스포츠신문들의 증면경쟁에 따른 기자스카웃이 이어지면서 1993년 11월 말 없어져 폐간되었다가 1996년 여름 격주간 형식으로 재창간됐다.], <투엔티 세븐([[대원씨아이|도서출판 대원]])>이, 2000년에는 <빅 점프([[서울문화사]])>까지 각각 폐간되었다. 기타 출판계도 1997년 [[고려원]]을 필두로[* 사실 고려원은 외환위기 이전에도 무리한 사업으로 인해 점차 내리막길을 걸었고 1년 전 발행된 처음이자 마지막 [[일본어]] 교재인 '코츠코츠 일본어'가 저조한 판매율을 선보이면서 사정이 악화된 것도 한몫 했다.] 수많은 출판사나 도매상들이 부도를 내거나 문을 닫았고 살아남은 출판사들조차 정부에 긴급지원을 요청했다. 출판 트렌드도 시나 소설 대신 경제서적 중심으로 바뀌었다. 게다가 문인들도 주 독자층인 고학력/사무직 여성들이 대거 이탈하고 영상매체 보급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. 신문을 비롯해 케이블 TV, 비디오 유통, 게임, 영화배급 등의 대중문화산업에 참여했던 여러 대기업들도 관련 사업을 접는 상황이 벌어졌다. 1997년 대농그룹이 [[헤럴드|코리아헤럴드-내외경제신문]]을 신동방그룹에 넘긴 걸 시초로 [[경향신문]]과 [[문화일보]]를 각각 소유한 한화그룹과 현대그룹은 1998년에 각각 두 신문사를 사원주주들에게 넘겼고, 1999년 삼성그룹과 롯데그룹도 [[중앙일보]]와 [[국제신문]]을 각각 분리시켰다. 하지만 문화일보는 여전히 [[현대중공업]]의 영향력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있다. 현대중공업 출자 공익재단이 상당수 지분을 소유하기 때문이다. 심지어 주요 언론사들도 직제를 축소/개편하는 등 구조조정을 단행했다. 지역 언론사들도 사정이 좋지 않아 1998년에 부산매일이 폐간되었고 2000년에 영남일보가 부도났다.[* 그러나 영남일보 자체는 계속 운영되었고 2005년에 조간으로 변경.] 그 외에 1987년 정간법 제정 이후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던 영세 지방신문사들도 발행을 중단하거나 폐간하기도 했다. 별도로 '삼성영상사업단'이란 미디어그룹을 만들어 운영했던 [[삼성그룹]]도 [[JTBC2|Q채널]], [[바둑TV]], [[캐치온|캐치원]] 등 [[케이블 방송]] 채널들을 [[중앙일보]]로 넘겼고[* 이 중 바둑TV와 캐치원(현 캐치온)은 [[온미디어]]로 넘어갔으며 바둑TV는 이후 [[한국기원]]으로 다시 넘어갔다.], 영화, 음반, 비디오 부문을 정리하거나 분사하였다. 이 중 DVD 사업은 1999년 '비트윈'으로 독립하여 2006년 [[SM엔터테인먼트]], 2008년 프리미어엔터테인먼트, 2011년 스카이온 등으로 소유권이 수 차례 넘어가 'SM픽쳐스', '프리지엠', '캔들미디어' 등으로 수 차례 바뀐 끝에 버킷스튜디오로 이어지고 있다. 시사영어사는 1997년에 교육채널 마이TV를 [[SK그룹|선경그룹]]에 넘겼고[* 2년 후 한국골프채널을 거쳐 [[SBS]]가 인수하여 [[SBS Golf]]로 존속하고 있다.] [[두산그룹]] 계열사 오리콤은 교육채널 [[JEI재능TV|두산슈퍼네트워크]]를 1998년에 [[재능교육]]으로 넘겼다. [[현대그룹]] 역시 [[현대방송]]을 1999년 넥스트미디어그룹으로 넘겼다.[* 이후 영화전문채널로 전환해서 2002년 [[CJ미디어]]에 인수되어 홈 CGV를 거쳐 2005년 [[채널CGV]]로 변경하였다.] 그 외에 한샘출판도 교육채널 다솜방송이 1998년 케이블 역사상 최초로 부도를 맞자 이듬해 TV홈마트에 넘겼고[* 다솜방송은 이듬해에 업종을 전환하여 의료+건강 26으로 개국했다. 이후 생활건강TV로 변경하였다가 2015년 폐국하였다. 현재는 [[카툰네트워크]] 계열의 [[부메랑(미국 방송)|부메랑TV]]로 방영 중이다.] [[KM(음악채널)|KM뮤직]](구 현대음향)도 2000년에 KMTV를 현대오토넷으로 넘겼다.[* 2001년 대영에이브이를 거쳐 2004년 CJ에 인수되었다가 2015년 폐국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[[GMTV(텔레비전 채널)|GMTV]]가 방영 중이다.] [[패키지 게임|PC 게임]] 업계에선 1999년에 [[LG그룹]] 계열사 [[LG디스플레이|LG LCD]]가 디스플레이 사업에 집중코자 게임사업부를 빼내 현재의 [[한빛소프트]]로 분할 설립했고 소프트웨어 사업부는 LG전자로 넘겼다. 마찬가지로 [[SK그룹]] 역시 계열사 [[SKC]] 사업분야 중 하나였던 게임사업도 [[위자드소프트]]란 업체로 분사시켰으며 왕성하게 활동했던 비디오사업부는 2005년 'SKC미디어'로 분사시켰다. 게다가 이 무렵에 [[번들 CD 경쟁시대]] 과열, 인터넷 불법 다운로드 및 [[온라인 게임]] 시장 확대 등으로 인해 한국 패키지 시장은 점점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였다. 이렇다보니 게임 회사들은 원가 절감을 위해 이 무렵을 기점으로 [[주얼 게임|주얼 CD]][* 패키지와 매뉴얼을 축소하거나 아예 빼서 CD만 포장하여 판매하는 형식.] 형태로 파는 경우가 많아졌다. 한국산 고전 명작 RPG로 손꼽히는 [[날아라 슈퍼보드 -환상서유기-]]는 개발 도중 IMF 사태가 터지면서 후반부를 날림으로 완성시켜 발매했다. 전반부의 탄탄한 스토리와 게임성에 비교해서 후반부는 복붙 미로를 통과해서 갑자기 최종보스전을 하고 끝나버리며 잔뜩 풀어놓은 떡밥도 전혀 회수하지 않은[* KCT미디어가 결국 도산하면서 영원히 이 떡밥들이 회수될 일은 없게 되었다.] 등 대놓고 날림으로 만들어졌기에 아직도 이 게임을 추억하는 팬들은 아쉬워하게 되었다.[* 월드맵의 크기와 회수되지 않은 떡밥들을 통해 추정해보면 본래 기획한 게임의 볼륨은 2~3배 정도는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. 물론 IMF 사태가 터지지 않아 이 게임이 계획대로 완성되다고 해도 정말 그만큼 더 재미있었을지, 오히려 미완성작이었던 현실에서보다 나쁜 평을 받았을지는 알 수 없지만.] 제작진도 많이 아쉬웠는지 곳곳의 NPC들이 게임이 미완성이라 안타깝다거나 IMF 와중에 게임을 구매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등의 멘트를 한다. 지금 와선 발매 당시의 시대상을 떠올리게 해주는 요소가 되었다. [[콘솔 게임]]은 마지막 대기업 정식수입 콘솔이었던 [[닌텐도 64|현대 컴보이 64]]가 현대그룹 [[왕자의 난]]과 IMF까지 겹쳐서 힘들게 되어버렸다. 이보다 그렇지 않아도 IMF 이전부터 [[수입선다변화]][* 해당 위기가 터지던 1997년 수입 자유화됨.], 일본문화 봉쇄 등의 영향으로 반쯤 블랙마켓이었던 상황에서 현지에서 공수해 오거나 불법 [[보따리상]]을 통한 정품 구매층조차 철처하게 박살이 나서, 2002년 [[플레이스테이션 2]]가 한국시장에 진출하기전까지는 [[PC 게이밍]]보다도 더 복사 문제에 훨씬 둔감한 시장이 되어 버렸다.[* 이 시기를 기억한다면 [[패미클론]]이 제조사별로 당당하게 대형마트에 진열되어 있던 그림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.] 타 소프트웨어 시장도 마찬가지여서 정부의 지원 해지로 수많은 소프트웨어 개발업체들이 문을 닫거나 매각됐으며 특히 부도 위기를 맞던 [[한글과컴퓨터]]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 [[아래아 한글]] 개발중단 조건으로 [[마이크로소프트]]와 합작을 시도했다가 시민사회단체의 줄기찬 '아래아 한글 살리기 운동'으로 철회했다. 대신 '아래아 한글 8.15 특별판'을 1만 원에 출시해 한국산 워드프로세서 사용을 권장하기도 했다. 이 외에 [[대우그룹]] 모기업 (주)대우도 1999년에 영상사업부문을 [[동양그룹]]으로 매각했는데 정확히는 대우시네마네트워크 채널을 신규법인 '오리온시네마네트워크'로, 영화관사업부를 '메가박스씨네플렉스'로 각각 분할매각시켰다. 영화 및 홈비디오사업부도 배급처인 세음미디어로 넘겼다. 당시 [[삼성전자|삼성]], [[LG전자|LG]], [[대우전자|대우]] 등은 TV와 VCR 등의 영상 및 음향가전 하드웨어를 생산, 판매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련 소프트웨어 분야에도 손대면서 시너지효과를 얻고자 하였다. [[SK]]의 경우 [[SKC]]에서 [[비디오테이프]]와 [[CD]] 등을 직접 생산하였기 때문에 역시 영상, 음반 분야에 진출하기도 했다. 이 때문인지 신흥 미디어재벌이었던 [[CJ|제일제당]]과 [[동양그룹]]이 그 빈 자리를 메꿨으며 제작투자도 대기업 대신 중소 벤처창업투자사나 금융권 중심으로 변경됐다. 당시 소규모였던 몇몇 [[연예 기획사]]들이 잇따른 아이돌 그룹의 대히트로 대형화되었다. 또한 [[대종상]]의 후원기업인 [[쌍방울]]이 부도나면서 1998년에 대종상이 일시적으로 폐지된 적이 있다.[* 사실 대종상은 그 전에도 [[1996 대종상 시상식 논란|애니깽 사태]]로 홍역을 치렀다.] 당시 스몰마켓이던 인터넷 업계도 좀 타격을 입었는데 1998년 두산정보통신이 '인터피아'를 아이네트에 넘겼고 한글과컴퓨터도 '[[심마니]]'를 [[데이콤]]에 넘겼다. 1999년 [[현대정보기술]]이 '[[신비로]]'를 [[온세통신]]에 넘겼다. 무엇보다도 이 시기에 특기할 만한 점은 나라종금 등 일부 종금사들이 일본에서 끌어온 단기 차관을 연장시킬 방안으로 '''[[일본 대중문화 개방|일본에 문화시장을 개방]]'''해야 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한미투자협정에 따라 [[스크린 쿼터제|국산 영화 스크린쿼터]]를 축소해야 했다는 것이었다. 경제난으로 투자 활력이 떨어진 문화산업계였던 만큼 이 조치는 큰 폭탄과 다름없었고, 정부가 스크린쿼터 축소로 선회하자 영화인들은 '한국 영화의 종말이 찾아온다'며 [[명동성당]]으로 몰려가 시위하기까지 했다. 이 무렵에는 만화 분야처럼 사실상 준개방 상태에 있는 분야가 적지 않았다는 점, 그리고 중화문화권에 흡수되지 않은 대한민국의 저력을 대통령 및 정부 관계자들이 언급하곤 했다. 그만큼 충격이 컸던 사건이었던 것. 지금에 와서 보면야 선택권 면에서야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고 이것이 문화 침체기 이후에는 전화위복이 되어 문화시장의 혁신을 이끌어내 결국 한류가 나올 수 있지 않았냐는 시각도 드물게 있다. 사회적인 흐름으로는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는 경제적 부흥에 힘업고 '[[신토불이]]' 등의 레토릭으로 서서히 강해지고 있던 일종의 [[국수주의]]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걸 들 수 있다. [[개인주의]]를 서구의 퇴폐적 풍습으로 여겨 배척하던 사회적 풍토가 어쨌든 IMF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. 다만 이러한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아서 '한국적인 가치'에 대한 선호가 완전히 박살나고 [[자국 혐오]]나 미국병도 심해졌다고 보는 사람도 꽤 있다. 그리고 [[지상파]] 3사도 10대 취향 오락프로 편성 축소를 감행해 [[KBS]]에선 [[KBS 2TV|2TV]] 주력 오락프로인 <슈퍼 선데이>와 <[[가요톱10]]>, <토요일 전원출발> 등을 일방적으로 종영시켰다. KBS 측은 '''"경제가 나빠져 국민이 절망에 빠져있는데 연예 프로그램을 방송하는 것은 부적절하다."'''는 명분을 내세워서 종영시켰고 그 자리를 <세 바구니의 행복>이나 <다큐멘터리 대한민국>, <국민대토론> 같은 교양 프로그램으로 채워나갔다. 물론 진짜 목적은 긴축 경영의 일환이었으며 몸값이 비싼 아이돌 가수들을 불러서 가요 프로그램을 찍는 것은 제작비가 많이 든다.[* 그래서인지 가요톱10 막방이던 1998년 2월 11일 방영분에선 당시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던 신인가수들의 비중이 높았고 그 중에서도 아직 순위권에 들지 못한 곡들을 많이 소개했다. 훗날 <[[흔들린 우정]]>을 히트시키게 되는 1998년 당시 풋풋한 신인가수이던 [[홍경민]]도 이날 방영분에 출연했다.] 다만 제작진들은 KBS의 일방적인 '신편성' 방침에 적극 반발했고 시청자들이 KBS에 전화를 하면서 항의를 하는 등 후폭풍이 엄청나게 안 좋게 되자 KBS에서는 땜빵용으로 <브라보 신세대>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방송했지만 당연히 인기를 끌지 못했고, 다시 [[가요톱10]]의 뒤를 잇는 대중음악 순위 프로그램 [[뮤직뱅크]]가 신설되었다. 그리고 <슈퍼 선데이>는 <[[일요일은 즐거워|슈퍼TV 일요일은 즐거워]]>로 대체되었다. 심지어 와 <체험 삶의 현장>도 2TV로 옮겼는데, 일각에서는 "광고수익 노리려는 꼼수 아니냐"며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. 한편 IMF 외환위기 당시 프리랜서 연출자들의 영화감독 데뷔작이 될 뻔한 <제이슨 리>(고석만), <쿠데타>(김종학) 두 작품은 투자자를 구하지 못해 무산됐고, [[MBC]]가 예전 인기 드라마 작품들을 재방영했으며 [[SBS]]는 [[김종학(1951)|김종학]] 감독이 프리랜서를 선언한 후 처음 연출한 [[모래시계(드라마)|모래시계]]를 '''모래시계를 시청하지 못한 비 수도권 민영방송 시청자들을 위한다.''''는 그럴싸한 명목 하에 1998년 1월 14일부터 2월 22일까지 수목, 토일 4회 재방송하기도 했다. 특히 <모래시계>는 역대 한국방송작가상 드라마 수상작 중 유일하게 밤 9시 50분에 재방영됐는데 수목 시간에는 30%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했으나 주말 시간에는 최고 시청률 49%, 평균 시청률 20%대로 높은 인기를 끈 [[KBS 1TV]] [[용의 눈물]] 때문에 10%대 시청률로 손해를 봤다. 아울러, [[이승연]], [[김희선]] 두 미녀 스타를 전면에 내세운 KBS 2TV 주말드라마 [[웨딩드레스(드라마)|웨딩드레스]]는 "IMF 시대에 역행하는 사치성 드라마"란 지적을 산 데다 경쟁사 MBC [[그대 그리고 나]]에 밀려 조기 종영되어 주말연속극이 잠정적으로 종영됐고 1998년 <그대 나를 부를 때>를 끝으로 수목극을 잠정 종영했는데[* 그 시간대에 <[[공개수배 사건 25시]]>가 편성됐다.] 이 작품 외에도 일요아침드라마가 없어지기도 했다. 이에 KBS의 이금림, 정을영, 이영희 등 인기 작가-PD들이 SBS로 떠났는데, 이들이 SBS 이적 후 처음 선보인 작품들은 거의 기대 이하의 성적에 그쳤거나 평판이 좋지 않았다. IMF 이후 대부분 프리랜서 연출자들은 외주제작사로 가거나 프로덕션을 직접 설립하여 제작사 겸 연출자로 활동하는 한편, 방송사와 계약을 맺은 뒤 연출만 했다. 설상가상으로 [[차태현]], [[송윤아]] 등 자사 공채 출신 [[탤런트]]들이 전속계약 종료 후 프리랜서가 되면서 KBS 드라마는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했다. 같은 시기 MBC도 <인기가요 베스트 50>, <특종 연예시티> 등을, SBS도 , <70분 드라마>, <웃으며 삽시다>, <뉴욕스토리> 등을 종영시켰다. 특히 MBC에선 [[개그맨]] [[이철구(1963)|이철구]]가 1998년 1월 26일에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[[자살|극단적 선택을 하며]] 충격을 주기도 했다. 한편 해외에서는 영화 [[타이타닉(영화)|타이타닉]]이 대박을 쳤다. 세계 최초 [[10억 달러 돌파 영화]]로 한국에서도 경제위기 상황에도 불구하고 서울관객 197만이라는 사상 최대의 관객을 기록하였다. 당시에는 한국에서 관객 수를 집계할 때 서울 관객 수만 집계하였다. [[아카데미과학]]은 마침 그 때를 틈타서 이전부터 넘치던 1/350 타이타닉호 모형을 해외에 엄청나게 팔아치우고 새로 뽑은 1/400 신금형까지 대박을 쳐서 IMF 시대를 운좋게 흑자로 넘길 수 있었다. 1997년 4월 1일에 시행된 야간/할인시간 정액제는 이 사태로 입소문을 타 가입자가 증가해 '''대한민국의 인터넷 정액제의 기틀을 마련했다.''' 그리고 이 PC통신 정액제와 함께 한국 문화계는 대 복돌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.[* CO-LAN과 마찬가지로 밤에 다운로드를 걸어두고 자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.] 음악계를 예로 들면 IMF 관리체제는 음반시장 규모를 축소시킨 한편 상대적으로 불법 음반시장을 키웠다. 호주머니 사정이 나빠진 주요 음반 소비계층이 정품 CD 대신 불법 카세트테이프와 CD 불법 복사본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.[* [[http://monthly.chosun.com/client/news/viw.asp?nNewsNumb=200003100055|(월간조선 2000년 3월호, <10대의 구매력 앞에 무릎 꿇은 대중문화 시장의 내막>)]]] 이 '대 복돌 시대'는 10여 년 가까이 계속되다가 2010년대에 들어서야 합법적으로 컨텐츠를 접할 수 있는 플랫폼이 늘어나면서(예컨대 [[넷플릭스]], [[멜론(음원 서비스)|멜론]], [[Steam|스팀]] 등) 이러한 행위가 줄어들게 되었다. 1999년에 한국연예제작자협회가 한국 인기가수들을 총동원해 란 컴필레이션 앨범을 냈고, 특히 타이틀곡 '지금 다시 하나되어'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. 이 앨범은 한동안 잊혀지다가 2020년 코로나 사태 당시 재조명됐다. 1996년에 DVB-S 방식의 위성방송 시험과 함께 와이드 TV용 프로그램을 대거 편성하려고 했으나 엎어지고 단발성 특별 프로그램으로만 때운 듯하다.[* 당연히 대부분 프로그램은 4:3(…)비율의 기존 프로그램들이 채웠고 구매층 자체도 박살나 버렸다.] 사실 KBS만 하는것이라서 MBC와 SBS는 참여할 수 없었고, 1998년에 송출을 시작하긴 했으나 지상파를 그대로 중계했다.[* SBS는 2011년부터 송출을 중단하고 KBS와 MBC는 2014년부터 중단후 DVB-S2 단독 송출 중이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